올해 9월 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ICAO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국제민간항공기구는 민간항공운항에 필요한 표준과 권고를 제정하는 UN 전문기구
입니다.) 총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항공업계에 짙게 드리웠던 COVID-19 팬더믹의 길고 길었던 그림자를 함께 걷어내 가자는
의지를 방증하듯, 전세계에서 모인 인파 속 사무실에서는 한 동안 볼 수 없었던 활기가 느껴졌습니다. 항공분야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제게 이러한 희망적인 분위기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고향에서 온 반가운 얼굴도 보고, 존경할 만한 새로운 사람도 만났습니다. 세상을 연결하는 항공인으로써 국제기구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이러한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우연한 기회와 필연적 목적
어린 나이에 국제기구에 취업한 과정은 우연한 기회가 겹쳐진, 사실
분에 넘치는 행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2017년 8월 한국항공대학교에서 항공교통전공으로 학석사 연계과정을 마치고서 박사 유학을 준비했었습니다. 준비가 많이 부족했던 탓인지, ‘설마 그 여러 곳 중 하나는 붙겠지’ 했던 막연한 기대와 달리, 지원했던 모든 곳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서
사실 많이 속상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했는데 먼저 취업한 주변 친구들에게 뒤쳐지는 조급한 마음과,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불안한 미래 걱정에 잠을 설쳤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ICAO 본부 6개월 인턴 공고를 보게 되었고 다음 입학 원서를 넣을 때 까지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지원했던게, 어쩌다 보니 이번엔 덜컥 붙었고, 사실
이전까지 감히 도전해볼 생각도 못했던 국제기구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만나는 분들께서 가끔씩 어떻게 국제기구에 왔느냐,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실 때마다 지금도 귀가 뜨거울 정도로 많이 부끄럽습니다. 물론
아예 노력을 안 한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젊은 나이에 저보다 더 뛰어난 학업 성취를 이루신 분들, 더 꾸준하고 열심히 노력한 분들도, 더 어려운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나신
분들도 정말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뚜렷한 목표와 원대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위대한 분들 대신, 여기저기 헤메고 어리숙하기만 했던 제가 한 줄기 기적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보이지 않는 원망도 많이 들었을 것 같고, 도대체 저를 채용하셨던
분은 보잘것 없는 제게 무엇을 보았길래 저를 선택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고민 끝에 저는, ‘학부 때 쌓아온 항공분야의 지식과 대학원에서
새로 배운 데이터 분석, 머신러닝과 인공지능 분야의 지식을 함께 활용하되, 스스로 엔지니어나 개발자 수준의 지식을 갖추진 못했지만 국제기구와 같이High-Level
(세부적인 기술적 내용보다는 큰 방향성에 집중하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 시야에 맞춰,
빠르게 발전하는 최신 기술과 미래 항공교통 시스템에 필요한 국제 정책과의 간극을 메워주는 “통역사”의 인재로 성장해야겠다.’ 라는 커리어 목표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온 동양인 청년이 만드는 작은 인공지능 이야기를 – ‘다음 20번째 ICAO 부속서는
인공지능일 것이다’라는 주장 – 여기 사람들은 꽤 재미있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꿈을 찾아서
짧았던 6개월의 ICAO 인턴이 끝난 뒤, 도로 하나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IATA (International Air Transport Association; 국제항공운송협회는 전세계 약 290여개 항공사의 연합체로 항공사의 권익을 대변하는 비정부 국제기구입니다.) 내 항공안전 및 운항데이터 분석 부서로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머신러닝과 인공지능 지식을 활용하여 IATA에서 글로벌 항공안전리스크 파악 및 동향 분석을 수행했습니다. 이제는 잠시 왔다가는 인턴의 신분이 아니라, 정규직의 신분으로 본격적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름 치열하게 생활했었습니다. 사회초년생으로써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그 가운데서 소중한 교훈도 많이 배웠습니다. 국제기구 직원이라는 후광을 업고서 다양한 글로벌 회사들과 명망있는 연구소들 가운데서 나름 목소리도 낼 만큼 성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겸손한 모습보다는, 제가 스스로 열심히 한 덕분에 여러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큰 무대에 서 있다는 착각으로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갔었던 때 이었습니다. 팬더믹이 오기 전까지 말이죠.
국제기구에 근무하면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저마다의 스토리를 갖고 옵니다. 부뿐 꿈을 앉고서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더 좋은
삶을 위해서. COVID-19 팬더믹은 그런 이민자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동료들과 그 가족들, 간신히 마련한 삶의
터전을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급히 떠나야했던 사연들 가운데, 누군가는 선택받고 누군가는 떠나야 하는
환경에서, 함께 동거동락했던 동료들은 어느새 밟고 일어서야 할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격무와 스트레스보다 견디기 어려웠던건, 상호 비방과 불신으로 빚어낸 냉혹하고 때로는 부당했던
결정 앞에서, 조각난 꿈을 주섬주섬 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동료들을 봐야했던 경험과, 마음 한구석 이번에도 생존했다고 안도하는 이기적인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항공업계에 근무했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끝이 보이지 않던 팬더믹 기간에서 저는 혼돈의 바다 한가운데서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 공포의 파도 앞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30대가 되면서 회사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어른이라면 다 참고 사는 것이라고, 햇병아리
시절 사회생활 무서운줄 모르고 마음 먹었던 꿈과 치기어린 열정은 그렇게 잊혀갔습니다.
길고 길었던 캐나다의 추운 겨울이 끝나가고 눈이 서서히 녹아가기 시작하는 3월
말, 지겨웠던 팬더믹이 서서히 끝나가는 듯, 어쩌면 그저
애써 외면하려는 듯, 오랜만에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점심시간 엘러베이터 안에서 옆부서 차장님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친분이 있는 분은 아니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잘 지내시냐, 스몰 토크로 안부를 물었지만, 뜻밖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몇년 전, 처음 너를 봤을 때 너의
발표에서 느껴지는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 포부를 가지고 있느냐”. 별다른 뜻으로 말씀하신건 아니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스스로의 모습을 똑바로
봤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애써 덮어둔 불안함과 좌절감을 다시 똑바로 마주하게 된 저는, 이런저런 핑게로 쉽사리 포기하고 무력하기만 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처음 고향을 떠나 먼 캐나다라는 나라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과연 무슨 일이 있을까,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하면서도, 몇년
뒤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기대했던 것과 지금은 많이 달랐습니다. 못난 저는 과거의 저에게도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3개월 뒤인 올해 6월 말, 저는 ACI (Airport Council International; 국제공항협의회는 전세계 약 1,950여개 공항의 이익을 대표하는 비정부 국제기구입니다.) 으로 이직하였습니다. 경제학 (Economics) 부서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새출발하는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사람도 많이 만나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항공교통물류학부때 경제학 수업에 조금 더 집중할 걸 싶다가도, 나름 과거 경력을 활용해 전세계 공항 교통량 예측 및 분석을 하는 새로운 재미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ACI내 최신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전세계 항공업계가 많이 회복되었음을 나타납니다. 2022년 2분기 전세계 승객 수는 2019년 2분기 대비 75.2% 수준이며, 북미시장은 89.8%, 유럽의 경우에는 83.5% 그리고 특히 남미는 94.9% 수준으로 매우 긍정적인 지표 – 그러나 아태지역은 54.1%의 큰 차이를 보임 – 입니다. (출처: ACI World, The impact of COVID-19 on airports—and the path to recovery, October 2022) 아직 갈길이 많이 남았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는게 아닐까, 다시금 마음 한구석 희망이 피어나는 듯 합니다. 이러한 희망은 지난 몇 년간 어려움을 겪었던 항공업계에 근무하는 모든 이들이 바라던 것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됩니다. 얼어붙었던 항공업계 고용시장이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여기 제가 있는 국제기구에서도 정말 오랜만에 활기찬 분위기 속에 새로 입사한 동료들을 매주 만나고 있습니다. 새로 입사하는 신입 사원들을 보며, 한국항공대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국제기구에 진출하려고 하는 꿈을 가지고 노력하셨던 선배님들, 동기들 그리고 후배님들이 기억이 납니다. 이러한 희망이 고향인 대한민국에도, 한 번쯤 국제 무대에서 커리어를 펼치는 꿈을 가지고 계셨던 동문들께, 한국항공대학교에서 꿈을 키워나가는 후배 여러분께 닿기를 기원합니다.
캐나다에서 전하고 싶은 말
최근 9월에 발간된 세계 경제 포럼(WEF: World Economic Forum) 에서 전세계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 73%에 해당하는 응답이 2023년 중 경제 침체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하였습니다. (출처: World Economic Forum, Chief Economists Outlook: September 2022) 이번달인 10월 국제 통화 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서는 전세계 경제성장율은 2021년의 6.0 퍼센트에서 2022년 3.2퍼센트, 그리고 2023년에는 2.7퍼센트로 둔화될 것이라 전망하였습니다. (출처: International Monetary Fund, World Economic Outlook Report October 2022) 매일 뉴스에서는 인플레이션, 금리, 환율, 국제 유가 등 모든 지표를 통해 업계의 험난한 앞 길을 예보되는 듯 합니다. 입시, 졸업, 취업, 결혼, 내집마련, 육아 등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면 숨 쉴틈 없이 더 큰 시련이 찾아오는 마치 젊은 우리 인생을 보는 듯 합니다.
인턴으로 국제기구에 처음 온지 5년이 지난 지금의 저는 사실 아직 첫발 뗀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소한 일에도 능숙함과는 거리가 먼, 미숙한 모습을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해야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커리어 패스를 성공적으로 만들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아직
감히 조언을 할 만큼 제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적은 없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이렇게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유는, 그리고 이미 삶의 무대에서 멋진 활약하시고 계시는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국제기구라는 다른 세상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자기계발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학교와 직장에서 하는 우리 평범한 젊은 꿈과 고민들 속에 발버둥쳐온 과정과, 그리고 앞으로도
혼돈이 가득한 미래로 내몰려 끊임없는 성장통 속에서 한발 한발 내딛어가는 한 명의 동료로써의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국제기구 취업을 희망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보잘것 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께서 위안을 얻고 목표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면, 아니
도리어 더 나아가서 만만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근무하며 많이 만나본 인턴 및 신입사원의 사례로 보건대, 제가 기억하는 한국항공대학교 동문 여러분들이라면 이미 본인의 생각보다 항공업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셔서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대학교의 커리큘럼이 국제사회에서 요구하는 항공분야의
전문가로써 성장하는데 첫 발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후배님들께, 국제기구라는 목표가 지금 당장에는 높아 보일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성장 잠재력을 믿고 앞으로 마주할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다보면 어느새 꽤 근접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적인 헛된 희망이 아니라, 이 길을 걷는 다는
것은 타지에서 홀로 겪는 외로운 느낌과 끝없이 싸워야 하며, 수 많은 탈락과 실패 앞에서 좌절할 것이며,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 무한한 경쟁과 차별적인
대우을 마주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각자 선택한 길이 어디로 이어질 지 모르겠지만 함께 방황하는 젊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음 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인상깊게 읽었던 룰루 밀러의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 한 구절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자기 기만; 긍정적 착각 –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