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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벨’을 꿈꾸는 벨에너지 양기곤 회장(항공통신공학과 72)

  • 2022-07-20

 

 ‘전화기 발명가’로 알려졌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은 사실 전화기를 제일 처음 발명한 사람은 아니다.
 

  그의 진짜 업적은 전화기를 세상에 널리 보급한 일이다. 벨은 오늘날 세계적인 통신회사가 된 AT&T의 전신인 벨 전화회사와, 전기.전자.통신.컴퓨터 분야에서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벨 연구소를 설립했다. 사실 그는 ‘기술의 선구자’가 아닌 ‘기술 사업화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벨에너지 양기곤 회장(항공통신공학과 72.항공통신정보공학과 석사)이 사명에 ‘벨’이란 이름을 넣은 건 그래서다. 기술을 사업화하여 사람들의 삶에 진정 이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그가 전 회사인 ‘벨’웨이브로부터 현재의 회사인 ‘벨’에너지까지 이어온 경영철학이다.


  양 회장이 지난해 창립한 벨에너지는 신재생에너지, 그중에서도 ‘바이오연료’를 주 사업영역으로 하는 회사다.


  바이오연료는 살아있는 미생물과 동식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연료를 가리킨다. 바이오연료로 쓰이는 유기체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소비’하고 연료로 연소 되는 과정에서 다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이처럼 소비와 발생의 순환을 통해 실질적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0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차세대 연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오연료의 상용화까지는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았다. 기존의 화석연료와 석유연료를 대체하려면 기술발전에 더해 경제성과 효율성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벨에너지는 새만금, 인도네시아, 북유럽이라는 전혀 다른 세 개의 지역에서 이 과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벨에너지를 구상한 건 10년 전부터예요. 사업을 계획하면서 신재생에너지 클러스터로 지정된 ‘새만금’,  바이오연료의 원료가 되는 팜유를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자원보국 ‘인도네시아’, 미국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에너지.환경 관련 기술을 보유한 ‘북유럽’, 이렇게 세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어요. 이들 키워드를 연결해 신재생에너지 회사를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시작은 새만금이었다. 전북 군산이 고향인 양 회장은 고향에서 가까운 새만금 지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세계에서 가장 긴 33km의 방조제로 바다를 메워 만든 새만금은 서울 면적의 3분의 2에 달하는 넓은 땅으로, 정부가 지정한 신재생에너지 클러스터다.


  벨에너지는 양 회장이 벨웨이브 경영 시절부터 2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인도네시아로부터 원료를 공급받고, 북유럽의 뛰어난 에너지 관련 벤처와의 기술제휴를 맺어, 새만금에서 바이오연료 생산 기지를 구축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다음 달에는 인도네시아에 바이요연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준공하고, 올해 안으로 노르웨이의 K사, 스위스의 W사와의 기술제휴를 위한 계약을 성사시킬 예정이다. 여기에 국내 모 대학과 협약을 맺고 고순도 바이오연료 정제기술을 향상시킬 방안도 연구 중이다.


  양 회장은 “사업을 처음 시작한 건 벨웨이브였지만, 인생의 마지막 성과는 벨에너지에서 거뒀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양 회장의 첫 회사인 벨웨이브는 한때 연 매출 4,000억 원을 넘겼던 휴대폰 개발업체(ODE.휴대폰 관련 첨단기술을 개발해 제조업체에 기술만 판매하는 회사)였다. 자체개발한 휴대폰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리면서 2003년 국내벤처기업 중 수출실적 1위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그즈음 일본 소프트뱅크사로부터 2000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한 일도 큰 화제가 됐었다.


  벨웨이브가 승부를 건 것은 당시 세계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던 GSM 휴대폰 시장이었다. 대기업이 버티고 있는 내수 시장 대신 중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 중국에서 통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GSM 휴대폰 기술력을 확보한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 여기에는 GSM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의 반도체 제조회사 TI(Texas Instruments)와의 전략적 제휴도 큰 몫을 했다.


 “당시 TI 임원이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가 회사 규모를 보고 실망을 했는지 저한테 30분 안에 제안내용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때 제가 ‘TI는 GSM 휴대폰에 필요한 세계 1등 칩셋과 소프트웨어를 가진 회사지만, TI의 원천기술은 생선회와 같다. 중국 사람들은 생선회를 먹지 않으니, 벨웨이브가 TI를 대신해 중국 시장을 위한 요리를 하겠다’고 말했는데, 가려던 TI 임원이 도로 자리에 앉더군요(웃음). 그리고 2시간 동안 저랑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후 TI와 파트너십을 맺었죠. TI가 벨웨이브에 4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칩셋 소프트웨어를 소스까지 다 넘겨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요. 그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벨웨이브는 중국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뒀고요.”


  TI가 벨웨이브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투자까지 진행한 건, 사실 양 회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 회장이 벨웨이브를 처음 창업한 것은 1999년, 한국 나이로 48세 때였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CDMA 핸드폰 기술을 개발하는 무선기술연구실장을 역임하며 삼성, LG 등 대기업과의 공동개발 및 기술전수를 담당했다. 이후 코오롱과 포스코가 합작해 신세계 이동통신을 설립할 때는 기술경영 참모로서 코오롱 그룹 기획조정실 임원으로 일했고, 다시 팬택으로 스카웃 되어 연구소장을 거쳤다. 기술에 정통한 엔지니어로서 출발했지만, 마케팅, 수출, 품질 등 종합적인 경험을 쌓은 뒤 벨웨이브를 설립한 셈이다.


  양 회장은 “창업을 하기엔 늦은 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인생의 목표는 처음부터 ‘창업’이었다”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창업을 꿈꿨던 그에게는 사실 모든 커리어가 “창업을 위한 여정”이었다고 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준비한 창업인 만큼 그에겐 몇 가지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 원칙은 ‘수출중심 회사로 만든다’는 것. 실제로 벨웨이브는 매출의 99%가 수출을 통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TI, 씨티코프, 소프트뱅크 등 글로벌 회사와 손을 잡고 글로벌 경영을 추구했다.


  두 번째 원칙은 ‘투명한 경영’이었다.


 “벨웨이브는 정말로 투명한 경영을 했어요. 어쩌면‘법적인 차원’을 넘어 ‘도덕적인 차원’까지요.
덕분에 주주들과도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었죠. 정도를 걸어도 성공하는 비즈니스를 만들어 보여주자, 내가 한번 그런 사례가 되어보자, 하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벨웨이브는 당시 휴대폰계의 ‘오픈 플랫폼’ 이었다. 기술개발에 필요한 소스를 업계에 공유하고, 이름 없는 벤처기업이라도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기술제휴를 맺었다. 그러나 이런 관대함이 의도치 않은 손해로 이어지는 순간도 있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국제행사에서 벨웨이브의 기술을 ‘완벽하게 훔쳐 간’ 회사를 발견했지요. 한 회사가 GSM 휴대폰을 출시했는데, 현장 테스트를 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이건 완전히 우리 회사 제품이었거든요. 제가 엔지니어 출신이라 소프트웨어를 이것저것 테스트해봤는데, 저만 알고 있는 극히 작은 오류까지 카피했더라고요. CEO를 만나 면담을 하니 처음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더군요. 그 CEO에게 딱 두 가지만 요구했어요. 사실을 확인해달라, 그리고 반성문을 하나 써달라고요. 다음에 만났을 때 그분이 연필로 자필 반성문을 써왔더라고요(웃음).”


  나에겐 확고한 원칙을 적용하는데 남에겐 너그러우신 것 같다는 말을 하자, 양 회장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어쩌면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가톨릭이라서요.”


  그러나 이러한 확고한 원칙으로 성공을 거두던 벨웨이브도 2012년 파산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기업인 S사와의 소송이 끝없이 이어졌고, 대만의 미디어텍(MTK)과의 기술제휴가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양 회장은 “벨웨이브 최대의 걸작”인 세계에서 가장 얇은 슬라이딩폰을 개발하려고, 당시 벤처기업에 불과했던 미디어텍의 멀티미디어칩을 탑재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칩이 끝내 기술적 오류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양 회장은 지난 실패를 떠올리면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1세대 벤처기업가로서 여전히 정도를 지키면서 아직은 심신이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파산 이후 양 회장은 지인들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문을 해줬다. 기업이 구조조정을 통해 건강한 회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건 그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 거친 과거이고 실패였기 때문이다.


 “법적인 절차까지 가기 전에 구조조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갈 때까지 가다가 멈추니까 내가 아니라 다른 모든 상황이 결정하는 최악의 상황이 오게 되는 거예요.”


  한번은 카이스트의 초청을 받아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한 특강을 했었다. 처음엔 “지금 잘 나가는 기업가도 아니고, 한번 큰 실패를 한 기업가이지 않느냐”며 사양했다. 그러나 카이스트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실패가 학생들에게 더 소중한 교훈이 될 것”이라며 오히려 그를 설득했다. 결국 강단에 선 그는 특강 제목을 ‘타이밍’으로 정했다.


 “타이밍만 잘 써도 어마어마한 기회가 생깁니다. 그런데 타이밍이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릅니다. 1초도 될 수 있고, 몇 시간도 될 수 있고, 몇 년도 될 수 있지요.”


  그에게 벨웨이브를 접은 후 보낸 10년의 시간은 바로 그‘타이밍’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기업경영’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는 말이 있어요. 자전거를 타듯 계속해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진다는 거죠.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전거로 국토종단을 했을 정도로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데, 자전거는 멈춰도 넘어지지 않아요. 오히려 쉬었다가 다시 달렸을 때 더 잘 달릴 수 있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한국항공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양 회장은 2008년 최고영예상(Distinguished Honors) 수상 후 졸업식 축사 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당시 그는 이름을 가린 두 사람의 프로필을 학생들에게 보여줬었다. 늦은 나이까지 공부하며, 실패를 거듭한 인물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란 링컨과 처칠이었다. 양 회장은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정말 포기하지 마라”, 단 세 마디만 하고 강단을 내려왔다.


  그는 이제 일흔을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다음 타이밍을 노리고 있다.